포바이포 : 벤츠와 아우디-레이싱 역사(통합)
2018년01월24일wed
기사최종편집일: 2018-01-22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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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10월16일 09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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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와 아우디-레이싱 역사(통합)
1930년대초 독일은 패전이 몰고온 심각한 경제불황에..

예전에 오프로드어드밴쳐에 썼던 벤츠와 아우디-레이싱 역사 관련 기사를 포바이포(4x4)로 옮겼습니다.

1930년대초 독일은 패전이 몰고온 심각한 경제불황에 신음하고 있었다. 독일사회에 불안과 혼란이 팽배한 가운데 아돌프히틀러(Adolf Hitler)가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독일국민의 자긍심을 부축이는데 앞장섰다.

이에 따라 독일정부는 자국민이 세계최강이란 것을 과시하기 위한 분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중 하나가 포뮬러 그랑프리(Fomula grandprix)대회였다.

히틀러는 자동차 경주같은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희대에 악인이긴 했어도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었고 상당히 영리했다고 한다. 독일이 국제자동차 경주에서 승리하면은 국민여론이 좋아질거라고 감지했다.

그는 1933년에 독일 총통이 되자마자 지원정책을 내놓게 된다. 포뮬러그랑프리에 참가하게 되는 독일에 자동차 메이커에게는 50만 다이히스마르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메르세데르벤츠(Mercedes-benz)로 유명한 다임러 벤츠(Daimler benz)는 독일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자동차 메이커의 선두주자였다. 벤츠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원금을 탔다.하지만 우승의 명예를 노리는 것은 다임러 벤츠만이 아니였다.

일년전 불황으로 인한 제정압박 때문에 네개의 자동차 메이커가 하나로 합병됐다. 아우디(Audi), 반더러(Wanderer), 호르히(Horch), 데카베(DKW) 이상의 네개의 회사는 아우토유니온(Auto Union )라는 한회사가 됐다. 아우토유니온은 경주차를 개발할 자금력은 없었지만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Ferdinand Porsche)라는 천재적인 자동차 엔지니어가 있었다.

포르쉐 박사는 이미16기통에 경주용 자동차를 설계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히틀러에게 두 개의 독일회사가 경주에 참여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포르쉐 박사의 의견에 공감한 히틀러는 아우토유니온에게도 지원금을 나눠줘 벤츠와의 경쟁을 가능하게 해주었다.1934년 아우토유니온은 석달동안 전력투구해 새로운 형태의 경기용 자동차를 만들었다. 후미에 탑재한 3.4리터 16기통 엔진을 통해 314마력에 브레이크 파워를 자랑하는 타입-A(Type-A)가 그것이었다.

엔진의 회전속도가 아주 낮기 때문에 안정적이란 것이 특징이었다. 경주가 끝날 때마다 분해했다가 재조립 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비용이 절감이 되었다. 연비효율도 좋았다. 포르쉐 박사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엔진을 차체 후미에 그리고 연료탱크는 엔진과 운전석 사이에 탑제 한다는 설계였다. 엔진을 운전석 뒤에 둔다는 개념에 리어엔진카(rear engine car) 는 아주 독창적이었다. 당시로는 놀라울만큼 획기적인 경주용 차였다. 포르쉐 박사는 연료탱크에 든 약 70겔론의 연료가 소모 되면서 무게가 점점 줄어 들면서 차체에 균형에 악영향을 준다고 판단하게 됐다. 하지만 차체에 정중앙에 두게 되며는 그 불균형이 덜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우토유니온은 1934년 5월 독일 아구스(Augus) 대회에 첫 출전했다. 부가티(Bugatti), 마세라티(Maserati), 알파로메오(Alfa-Romeo)등이 휩쓸던 코스였다. 아직도 설계를 개량하고 있는 아우토유니온의 신차는 일단 처녀출전으로 3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아우토유니온과 달리 다임러벤츠는 자동차경주에 참여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세계 정상급의 경주용 차를 개발하는데 유리한 입장이었다.

당시 벤츠에서 가장 성공적인 차는 SSK(Mercedes-Benz SSK)였다. 하지만 자동차 경주용 차로만 들어진 것은 아니였다. 일반 운전자들이 타는 차였으나 워낙 성능이 좋아 각종 경주를 휩쓸었다. 다임러벤츠에서는 그랑프리 대회를 준비하게 되자 새로운 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경주용으로 높이가 아주 낮은 새시를 만들었다. 거기에 SSK에 과급기관형 엔진을 개발한 노하우로 새로운 엔진을 만들었다.아우토유니온은 타임-A 라는 신차를 내놓은 반면 다임러벤츠에서는 W-25라는 차를 내놓았다, 기존방식대로 엔진이 차체 앞부분에 장착된 스타일이었다. 직렬8기통엔진으로 과급기관형이었다.

당시 경주용차에서는 보기 힘든 멋진 외관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인 방식의 다임러벤츠와 혁신적인 형태의 아우토유니온차가 흥미로운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다임러벤츠의 차는 무게가 750kg이라 포뮬러 규정의 무게를 2kg초과한 것이었다. 그때 한직원이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이 어떠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당시 경주용차들은 모두 백색페인트로 치장을 했었다. 차제에서 페인트칠을 모두벗겨내니 2kg이 줄어들어 다행히 규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다임러벤츠의 차는 일부러 페인트칠을 벗겨냈고 아우토유니온의차는 아예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실버 에로우(Silver arrow)" 즉 은빛 화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두회사의 차는 6월3일 에펠 그랑프리(Eiffel grandprix)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치열한 접전끝에 다임러벤츠가 아우토유니온의차를 간발에 앞장섰다. 엔진이 뒤에 달린 차는 운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때 아우토유니온의 선봉자와 같은 한스슈트크(Hans Shutek)가 나왔다. 그는 아우토유니온이 참가하는 모든 대회에 대표선수로 참가했다. 이 두회사는 1934년7월15일 그해 가장 치열했던 독일 그랑프리에서 맞붙었다. 한스슈트크는 에펠 그랑프리에서 벤츠와 붙어진 것을 설욕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막상막하의 기술력을 사진 두회사간에 치열한 경쟁은 독일에 자동차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됐다. 4시간38분에 치열한 접전끝에 아우토유니온의 한스슈트크가 먼저 골인하게 된다. 슈트크가 양사의 자존심이 걸린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광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슈트크는 그야말로 독일의 영웅이 되었다. 첫시즌에서 전세계 15개대회에 참가한 이들 두회사는 도합 7번의 우승을 거두게 되었다.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실버 에로우(Silver arrow)"끼리의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1935년 이 두회사는 두 번째 스피드 경쟁을 시작하게 됐다. 두회사는 각종 유럽대회를 휩쓰는 한편 상대편을 능가할 기술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다임러 벤츠와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력에 맞서 아우토유니온은 타입-B(Type-B)를 개발하게 되었다. 엔진출력을 3.4리터에서 4.9리터로 높인 차였다. 또한 뒤 현가장치를 토션바 형식으로 만들어 조향력을 향상시켰다.

포뮬러 대회 그랑프리 때문에 엔진을 향상시킨 것 이외에도 뒤 현가장치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여동차축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현가장치를 개량했기 때문에 바퀴의 요동이 덜해졌다. 다임러벤츠에 W-25는 크게 개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엔진의 성능을 4.3리터 과급 기관으로 늘려 아우토유니온과 맞붙을 수 있었다. 리어 엔진형 차를 능숙하게 몰수있는 드라이버를 수소문하던 아우토유니온은 이탈리아 출신의 아킬레아르지를 채용했다.

아르지(Argy가) 유니온에 입단했을 때 파흘피에츠(Pietz)라는 독일출신 드라이버도 있었다.그런데 아르지가피에츠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팀동료 사이에 악감정이 쌓이게 되었다. 이들간에 갈등과 기타문제들 때문에 아우토유니온팀은 고전했다. 그해말까지 고작 3회의 우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임러벤츠 팀은 감독인 알프레도노히바우어의 통솔아래 승승장구하게 됐다.

다임러벤츠는 최고의 드라이버를 영입하기 위해 늘 노력했다. 1930년대 당시에는 루돌프카라치올라(Rudolph Caracciolo)가 최고였다. 이타리아식 이름 같지만 카라치올라는 독일인일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가장 전설적인 드라이버였다. 그는 1926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명성을 얻었다. 경기도중 비가 심하게 내려 길이 미끄러워졌다. 하지만 쏟아지는 폭우에도 카라치올라는 끄떡 하지 않았다.

빗길이 오히려 더 편한 듯 보일정도였다. 폭우 속에서도 우승한 카라치올라는 "베겐마이스터(Wegen Meister) " 즉 폭우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쁜 날씨에 강하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장점이었다. 다임러벤츠는 적극적으로 그를 영입했다. 1935년 카라치올라는 6번의 우승을 거두었다.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의 그랑프리를 석권하면서 자동차 경기의 최고 명예인 유럽챔피온으로 등급하게 되었다.

다른 회사는 연구개발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아우토유니온과 다임러벤츠사를 도저히 따라 갈수가 없었다. 불과1년 사이에 과거의 챔피언이었던 부가티(Bugatti), 마세라티(Maserati), 알파로메오(Alfa-Romeo)등은 우승권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첨단 항공기술을 응용해서 만든 독일 메이커의 자동차기술은 경쟁차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탈리아나 영국의 자동차메이커들은 독일의 두회사에 비해 한참 뒤지고 말았다. 그들은 1930년대 이후로 더 이상 기술개발을 하지 못하고 자포 상태에 빠졌다. 독일은 국제 자동차 경주를 석권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이 두회사의 경주용 차는 거의 천하무적이었다. 불과 몇년만에 독일의 자동차 드라이버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이제 자동차 경주는 가장 인기있는 관전 스포츠가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대회는 독일그랑프리였다.

관중수로 예기하면서 당시 대회마다 약30만에서 40만이 모여들었다. 요즘은 6만명정도만 들어도 대성황이라고 한다.1930년대에는 자동차 경주가 워낙 인기가 높아서 대회마다 30만이 모이는 것은 보통 이었다.1935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파지오르브날리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한 독일의 두 회사는 잃어 버린 독일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절체부심했다. 1936년 다임러 벤츠는 새롭게 개발한 신차를 선보였다. 모델명은 W-125였다. 새로운 차체 디자인이 눈에 띄였다. 예전보다 더 짧고 가늘고 좀더 유선형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신차의 진짜 강점은 후드속에 감쳐져 있었다. 기존에 W-25이 엔진을 좀더 발전시켜서 W-125의 엔진을 만들었다.

실린더의 내경을 넓혀 엔진출력을 5.6리터까지 성능을 높였고 최대치까지 높이면 646마력까지 나오는 차였다. 당시 포뮬러 그랑프리차 가운데 최강의 엔진이었다. 이것은 1980년대 그룹-C 모델이 나오기 전까지였다.다임러벤츠가 차제의 다자인과 엔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반면에 아우토유니온의 타입-B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엔진의 성능을 6리터에 520마력으로 개량했을뿐이었다.

유럽의 나머지 차들은 이들 독일의 양대 강자들 틈에 끼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 두회사는 단순한 경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독일 자동차의 왕자자리를 놓고 싸웠다. 그 대결이야말로 당시 독일에 최고의 구경거리였다. 이탈리아에게 뼈아픈 패배 이후 독일팀은 새로운 영웅을 찾았다. 그리고 한명을 발굴해냈다. 한번도 자동차경주를 해본적이 없는 인물이었다.아우토유니온은 조정하기힘든 리어 엔진차를 애를 먹있던 차에 그차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의외에 인재를 찾아냈다. 바로 번트로즈마이어(RoseMeyer)였다.
 


번트로즈마이어(RoseMeyer)는 데카베(Dampf Kraft Wagen:DKW)의 오토바이 경주선수로 뛰던선수였다. 그후 데카베는 아우토 유니온(Auto Union )에 합병되었다. 로즈마이어는 후보선수로 아우토유니온에 합류했다. 자동차 경주경험이 없던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즈마이어는 운전하기 힘든 리어엔진카(Rear engine car)의 아우토유니온의 차량을 모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오토바이를 모는 균형감각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엔지니어들에게 차량의 문제점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차개발에도 도움을 줄수가 있었다. 번트로즈마이어의 뛰어난 능력은 그의 세번째무대인 1935년 체코그랑프리에서 발휘되었다. 오토바이 경주 챔피언이었던 그는 루브날리를 무려 6분 차이로 제치고 첫우승을 거두었다.

관중 가운데에는 여성 비행사였던 엘리바이포른(Allee)도 있었다. 로즈마이어역시 아름다운 그녀의 팬이었다. 바이포른은 아프리카횡단비행에 성공한 독일의 최초의 여성이었다. 전세계를 비행하면서 많은 관심과 함께 독일의 국가적영웅이기도 했다. 아우토유니온측은 바이포른에게 대회에서 첫우승한 선수에게 축하인사를 해달라는 부탁을했다. 로스마이어는 그녀에게 반했고 그들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연인을 얻은 로스마이어는 1936년 에펠그랑프리를 시작으로 레이스에 전력투구했다. 에펠그랑프리(Eiffel grandprix)는 당시 가장 험난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앞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끼어 모든 선수들을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스마이어는 앞을 꽤뚫어보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마지막코스에서 로즈마이어는 파지오루브날리를 무려 2분30초 차이로 앞서들어왔다.

모든선수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로즈마이어는 안개의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달뒤 1936년 7월13일 번트로즈마이어와 엘리바이포른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지13일뒤 로즈마이어는 독일그랑프리에 참가했다.

이 경기는 루브날리가 작년대회에 우승한 대회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루브날리의 우승은 재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독일의 실버에로우를 따라잡는 차량은 없었다. 관중석에서 아내가 응원하는 가운데 로즈마이어는 신기록을 세우며 들어왔다. 로즈마이어는 경의적인 우승행진을 거듭했다. 경쟁사인 다임러벤츠와 독일팀이외에 이탈리아의 루브날리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섯 개의 메이져대회를 연달아 휩쓴 후 1936년 유럽참피온에 영예를 안았다. 신인선수로써 엄청난 성공이었다. 하지만 로즈마이어와 아우토유니온이 세계정상에 오르는 동안 스피드와 파워경쟁은 위험한 과열양상을 치달았다. 1937년 5월 다임러벤츠(Daimler benz)와 아우토유니온은 베를린의 아구스그랑프리경주장에서 만났다.

경사진코너와 긴 주로를 가진 초스피드경주였다. 지난시진의 패배를 맛본 다임러벤츠는 아구스(Agus)경주장에서 최대의 스피드를 낼 수 있게 차량을 개조했다. 폭이 짧으면서도 매끈한 유선형을 한 신차였다.

벤츠에서는 DLVT라는 12기통엔진을 개발했다. 750마력을 넘는 파워를 발휘하는 아주 강력한 엔진이었다. 기존에 W-25보다 60%나 향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아구스대회같은 특수한 코스에만 적합한 엔진이었다.아우토유니온도 벤츠에 대항하기 위해 엄청난 스피드를 발휘하는 유선형의 신차를 개발했다.

당시 아구스코스의 최고 기록은 로즈마이어가 세운 273Km였다. 직선주로에서는 384Km까지 나왔다. 번트 로즈마이어는 한번 더 유럽 챔피온을 노렸다. 로즈마이어의 가장 큰 경쟁자는 다임러벤츠의 루돌프 카라치올라(Rudolph Caracciolo)였다. 그는 노련하고 경기경험이 뛰어난 선수였다. 1937년 시즌에 로즈마이어와 카라치올라는 우승을 주고 받았다. 그 해 둘다 4번씩의 우승을 나누어가졌지만 로즈마이어가 우승한 대회는 공인된 대회가 아니였다. 따라서 3번을 공인된 그랑프리대회에서 우승한 다임러벤츠의 카라치올라에게 통상 두번째로 유럽챔피언의 명예가 돌아갔다. 하지만 그해 마지막 경기가 남아있었다.

첨단 경기용차끼리 또 한번의 대결이 펼쳐졌다. 무대는 독일정부가 후원하는 세계기록 단축 행사였다. 이와같은 기록단축행사가 열린 것은 아구스경기에서 다임러벤츠와 아우토유니온에서 유선형의 초스피드경주차가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상최고의 스피드경쟁에서 맞수끼리 다시 만났다.

벤츠는 이미 유럽 챔피온쉽을 차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기록 단축주행에 참가한 벤츠측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아우토반도로를 도로주행 중 공기저항으로 차가 뜨는 현상으로 경기를 포기해 버렸다. 벤츠측이 포기를하자 당시 국민적인영웅이였던 번트로즈마이어에게 관심이 모아졌다. 로즈마이어는 406Km를 넘나들며 당시 세계기록을 깼다. 로즈마이어는 다시한번 독인의 영웅이 되었다. 로즈마이어가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치욕적 실패를 맛본 벤츠는 고분고분 항복하지 않았다. 1938년1월 이들은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에 다시한번 도전하였다.

아우토유니온의 로즈마이어도 자신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이 도전에 참가하였다. 벤츠팀에 루돌프카라치올라가 먼저 출발하였다. 그는 로즈마이어의 기록을 약17마일 단축했다.이제 로즈마이어의 차례였다. 첫번째 주행에서 카라치올라의 기록에 약간 못 미쳤다. 하지만 그는 세계기록을 보유하고있는 스피드의 명예를 되찾기위해 다시 도전했다. 그날 아침의 바람은 평상시보다 세게불었기 때문에 포기를 권유했지만 로즈마이어는 이번기회가 아니면 다음해 봄까지 기회가 없음을 알고 재도전을 강행했다.

출발한지 9Km 지점부터 로즈마이어가 모는 아우토유니온의 차는 갑자기 중심을 잃기 시작했다. 시속400Km를 달리던차가 돌풍을 만나면서 도로옆으로 튕겨져나가 말았다. 로즈마이어역시 차에서 튕겨져 나무에 걸쳐져있는 모양으로 발견되었다. 마치 그는 잠시 잠을 자는 모습이었다. 독일의 젊은영웅 로즈마이어는 이 경기를 끝마치지 못하고 아까운 생을 마감하게되었다.

당시 운전자는 안전벨트나 헬맷등의 안전보호구를 착용하지도 않고 600마력이 넘는 차를 무방비로 타고 다녔다. 로즈마이어의 죽음은 독일 국민들에게 충격과 아픔을주었다. 미망인에게 수천통의 위로편지가 전달되었다. 그는 타고난 영웅이었고 자동차경주의 천재였다. 타고난 재능 때문에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성실과 인간적인면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있은 후로 독일정부는 세계기록단축행사를 전면중지하고 공식적인 그랑프리만을 후원하였다. 로즈마이어를 잃어 버린 아우토유니온사는 그 공백을 메꿔줄 다른 선수가 필요했다. 의외의 선수가 발탁되었다. 그동안 로즈마이어의 적수였던 파지오루브날리였다. 독일차의 기술적 우위 때문에 고민을 계속했었던 루브날리는 아예 독일의 명차로 갈아탈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차를 바꿔탄 루브날리의 성적은 그해 들쑥날쑥하여 2번의 우승에 그쳤다. 하나는 이탈리아그랑프리(Italian grandprix)였고 또 하나는 영국의 도닝턴그랑프리(Donington grandprix)였다. 아우토유니온이 안간힘을 썼지만 1938년은 다임러벤츠의 영광의 해가 되었다. 폭우의 왕자 루돌프카라치올라는 통상 3번째로 유럽챔피온을 차지했다. 하지만 유럽의 정치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독일자동차경주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1939년초 아우토유니온은 새로운 경기용차를 선보였다. 타입-B였다. 엔진은 3리터에 12기통엔진이었지만 성능이 향상된 2단 과급장치를 추가했다. 당시 경주용차량가운데 최첨단의 성능을 발휘했다. 이때 만든 아우토유니온의 과급장치는 1960~70년대까지 그대로 채택되었고 지금에 와서도 하나의 기술적 기준이 될만큼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파지오루브날리라는 스타급선수와 최첨단 차를갖춘 아우토유니온은 승리의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다임러벤츠 역시 기존의 차를 개량해 보다 작고 날렵한 W-154를 만들었다. 아우토유니온과 마찮가지로 2단과급장치를 채택해 막상막하의 기술력을 갖춘 것이다. 통상3번째 우승을 차지하고 4번째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다임러벤츠의 루돌프루브날리외에 벤츠에는 숨은 인재가 있었다. 헤르만랑(Hermann Lang)이었다. 오토바이선수출신인 랑은 1934년 정비공으로 다임러벤츠팀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팀의 감독인 알프레도노히바우어의 눈에 띠었다. 그의 업무중하나는 경기에 출전할 차량을 시운전하는 것이었다. 감독의 눈에 랑의 운전실력이 다른선수못지 않은 것에 감탄을 했던 것이다.

랑은 처음엔 후보선수로 뛰었지만 1937년에 정식선수로 뛰게되었다. 랑은 그해 트리폴리 그랑프리에서 첫우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서열이 낮은 그에게 우승의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않았다. 귀족같이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정비공출신의 랑은 무시를받으면서도 실력으로 이겨나갔다.

랑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우(Pau)대회 ,트리폴리(Tripoli)대회, 에펠(Eiffel)대회,벨기에(Belgium)그랑프리를 휩쓸었다. 그해 마지막 대회는 1939년 9월3일에 열렸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몇일 전이였다. 불안이 고조됬지만 대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경주로에서 스피트경쟁을 하는 선수들에게 전쟁은 관심밖이였다. 파지오루브날리는 마지막이될지모르는 이대회에서 멋지게 우승했다. 하지만 1939년은 헤르만랑의 해가되었다. 다섯개의 메이져대회를 석권하며 유럽챔피언 타이틀을 따낸 것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버에로우(Silver arrow)의 스피드전쟁은 막을내렸다. 그해 말 세계는 전쟁에 휩쓸렸다. 히틀러의 나치스정권은 다임러벤츠와 아우토유니온의 용맹한 선수들이 쌓아올린 영광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독인경주용차의 기술력과 선수들이 남긴 빛나는 유산은 현대자동차산업에 계승 되었다. 다임러벤츠는 이제 다임러크라이슬러가되어 세계 유수의 자동차메이커로 자동차 경기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아우토유니온은 아우디로 이름을 바꿔 고급승용차와 함께 경주용차도 생산하고 있다.

실버에로우의 명성은 그후손들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아우토유니온의 선수였던 한스슈트크(Hans Shutek)의 아들은 현재도 아우디소속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당시 아우토유니온때의 경기용차를 가지고 있는 아우디는 한스슈트크의 아들에게 시운전을 맡기기도 하였다. 영광의 유산이다.

1930년대말은 자동차역사의 황금기라고 말한다.혹은 자동차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시대였다. 히틀러가 다임러벤츠와 아우토유니온이라는 두회사를 경쟁하게한 것이 커다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당시 자동차경주선수들의 명예는 영원한 것이었다. 아우토반에서 목숨을걸고 달렸던 스피드경쟁은 인간이
달에 간 것과 같은 업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포뮬러 [formula] -

국제자동차연맹(FIA:Federation International Automobile)이 매년 발표하는 배기량·규격·타이어·차체 사이즈 등 경주용 차량의 규격을 말한다. 즉, 포뮬러는 대량생산되는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경주만을 위해 제작되는 자동차이며, 이러한 자동차로 열리는 자동차경주를 '포뮬러경주'라고 한다.

리어엔진 [rear engine] -

자동차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앞에 엔진을 설치하고 뒷바퀴를 회전시켜 주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뒤쪽에 엔진을 설치하는 것이 공간을 활용하는 면에서 유리하므로, 소형 승용차의 일부와 대형버스의 대부분은 이 형식을 택하고 있다. 이 형식은 엔진과 구동축(驅動軸)이 가까우므로 긴 프로펠러 샤프트가 필요 없으며, 출력의 손실이 적고, 또 바닥을 낮게 할 수가 있다. 다만 뒤쪽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조종성(操縱性)이 프런트 엔진 차와는 조금 다르다. 소형 승용차에 앞바퀴 구동이 보급되어 리어엔진은 적어지고 있다.

 

과급기관 (supercharged engine) -

기관의 체적 효율(volumetric efficiency)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여러가지 흡기 계통의 개선을 도모하고 있으나 흡기 용량을 증가시키는 방법의 하나는 과급기(supercharger)를 이용하는 과급 방식이다.

* 출저 : History challel / mercedes-benz / audi 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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